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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ㄴㅂ

영웅은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


 영웅은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 마땅히 행복했어야 할 날의 불행에도 죠나단 죠스타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으로 전부 됐다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죠나단이 에리나를 지키고 싶어했듯 에리나 역시 그를 지키고자 했으며, 그 의지로 선택된 것이 함께하는 죽음이었으나 죠나단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당신은 살아야만 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를 외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뒤에도 잊을 수 없는 말이 될 것임을 에리나는 그때부터 알았다. 폭발로 사라져가는 배 안에서 행복해야 한다고 말하던 그의 마지막을 기억한다. 그 모습은 이미 어떤 행복에 도달한 사람처럼도 보였다. …
 당신이 나의 행복이야, 에리나. 금방이라도 친숙한 목소리가 뒤따를 것만 같았다. 입 밖의 언어가 되지 못했을지라도 알 수 있는 것들은 많았다. 그래서 에리나는, 같이 죽게 두지 않은 죠나단을 단 한 순간도 원망한 적은 없었다. 그의 유품과도 같은 잔인한 용기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로 한다.
 다만 잔인한 용기를 기꺼이 거머쥐었다 하여 아무렇지 않아지는 것은 또 아니어서. 남은 생에 있어 미련은 오롯이 에리나 죠스타의 몫이 되었다.


 후회 없이 걸어온 충실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게 과연 죠나단이 바라던 형태였을지 의문을 느낄 때도 간혹 있었지만, 어차피 돌려받지 못할 답이라면 물고 늘어지기보다 한 걸음을 더 내딛으려 했다. 사람의 존재는 기억으로 증명된다지. 에리나의 삶은 에리나만의 것이 아니었고, 곁에는 늘 죠나단이 함께였으므로 이따금씩 밀려오는 고독도 에리나는 견뎌낼 수 있었다.
 그래도 한 번 쯤은 행복한지를 물어주는 목소리가 있으면 좋을 텐데. 답지 않은 생각을 떠올린 게 문제였나. 사람이 평소 하지 않던 것을 하면 죽게 된다던 말이 아무래도 아주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길고 날카롭게 찾아드는 경적. 이상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에리나는 점멸되는 시야를 느낀다.



 주변은 고요하다. 살았다기에는 바로 전의 기억이 있고, 죽었다기에는….
 무언가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 있었다. 그것이 손임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감각과 기억을 동원해 에리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내내 누워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여기는 어디지? 사후세계? 존재하고 있는 바닥을 손끝으로 더듬어보지만 무엇 하나 집히는 것은 없었다. 두려우면서도 약간의 기대감이 인다.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말았다. 여기가 죽은 뒤 자리하게 된 곳이라면, 그렇다면, 어쩌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순간 알 수 없는 방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미련을 지닌 자들이 도달하는 세계입니다. 눈앞에는 문이 있었다. 사방이 온통 어둠 뿐인데, 보이는 형태가 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챘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다.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운명이거나.
 에리나는 마치 어딘가에 이끌리기라도 하는 듯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빛 아래에서 다시 눈을 뜬다. …아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에리나.”

 다정한 목소리였다. 말아올린 입꼬리에는 지금도 여전히 어릴 때와 같은 장난기가 남아 있었다. 꿈…인가? 에리나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위를 본다. 낯설지 않은 천장이 보였다. 이어서 옮긴 시선 끝에는 적당히 채워진 술잔이 걸렸고. 눈앞의 남자, 죠나단은 가까운 잔 하나를 들어 에리나에게 건넨다. 별로 강한 술이 아니니 마셔보라며 입가 근처까지 뻗어오는 손이 있었다. 에리나는 말이 새어나오지 않는 입술만 달싹일 뿐,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환상. 그게 아니라면 주마등일 것이다. 에리나는 이 순간이 어떤 순간인지를 안다. 술을 한 모금 삼키고 나면, 그 앞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지도. 그리웠던 얼굴을 앞에 두고 무엇이라도 말해주고 싶었지만 반응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였다.

 “응? 마셔봐. …아주 조금만.”

 그럴 수 없어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나오지 않는 소리가 있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시간 또한 멈춰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에리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죠나단의 손 위로 얹는다. 부드럽게 맞잡는 손길이 이어지면 죠나단은 새삼 쑥스럽기라도 한 것처럼 웃는다. 부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보며 표정 굳히지 않기를. 에리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바랐는지 모른다.
 죠나단의 시선이 움직일 때면 그것이 찰나여도 심장이 쿵쿵거렸다. 소리 없는 카운트다운 속에 갇힌 것 같다고 느낀다. 영원하길 바랐던 순간이 영원하지 않음을 아는 것은 괴로웠다. 그럼에도 에리나가 고개를 떨구거나 눈물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행복해하는 죠나단이 있어서. 모든 것을 알고도 그저 이 순간이 기쁜 것처럼 마주 웃는 게… 에리나의 최선이었다. 그를 향한 애정이라고 볼 수도 있었을까.
 이윽고 죠나단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의 몫이었던 잔이 반 이상 비워진 채였다. 이상하다, 원래 저렇게까지 마시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의아했으나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에리나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어떻게 해도 준비되지 않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주마등이라면 과거의 기억에 불과하니 이번에야말로 죠나단의 곁에 끝까지 남아 있어줄 생각이었다. 주춤거리며 완전히 일어서지는 못하고 있는데 그런 에리나를 향해 죠나단이 묻는다. 함께 가줄 거지? 그건 선실로 돌아가라는 것과는 다른 말이었다.




 도착한 장소 앞에서 죠나단이 먼저 걸음을 딛는다. 초조한 기색의 에리나가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여긴 선창… 안 돼요, 이런 곳에 들어가면.”
 “괜찮아. 잠깐이니까.”

 악몽과도 같은 장소. 여기서 당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말하면… 믿지 않겠지. 더 정확히는 믿을 수 없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에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죠나단의 의지를 막는 역할은 이번에도 되지 못할 것 같았다. 침묵을 좋은 방향으로 해석했는지, 죠나단이 뒤돌아 에리나의 손을 끌어 잡았다. 거부는 물론 하지 못했다. …이런 걸 불가항력이라고 하던가? 당연한 듯이 이끌리게 되는 게 얼핏 첫 만남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무거운 호흡 한 번, 그 끝에 에리나는 과거의 참극 속으로 발을 들인다.

 “죠나단, …”

 디오에 대해서는 말해두는 편이 좋을까. 고민하느라 목소리가 떨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은 괜찮았지만 바닥에 닿을 때가 되자 절로 눈이 감겼다. 아아, 두 번씩이나…. 그러나 예상했던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직전에 들었던 죠나단의 말 외에 다른 이변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도.

 “에리나?”

 왜 눈을 감고 있어? 마음을 어루만지는 목소리가 있어 에리나는 조심스레 눈을 뜬다. 평범한 선창의 풍경이었다. 자리에는 죠나단과 에리나, 단둘만이 있었다. 당황한 얼굴이 그대로 티가 났을 거라 생각한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뭐라 답을 해야 하지. 당신이… 죽어야 하는데, 분명 죽어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아서요. 이건 너무 이상한 말이다.

 “…죠나단! 할 말이…,”
 “이곳에서는 괜찮아.”

 죠나단에게 사람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다. 그러면 지금 이 반응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우연으로 타이밍이 겹쳤다기에는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말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마치, 다른 데서는 괜찮지 않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

 “그러지 말고, 한 곡 어때?”

 잡은 손을 풀어낸 죠나단이 이번에는 마주 보며 손을 내민다. 위에서는 미미하지만 계속해서 흐르는 음악이 있었다. 에리나는 머뭇거리다가도 보이는 손을 맞잡는다. 밀어낼 수 없는 손길이었다. 동시에 다시 한 번 떠올린다. 불가항력, 운명이라는 것에 대하여.

 “꿈만 같아요.”

 그런 소리를 했다. 부드럽게 이끌리는 걸음은 자리의 곳곳에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크게 원을 그리며 도는 동작이 하나, 시야와 함께 뒤로 넘어가는 동작이 또 하나. 배 안에서의 작은 무도회였다. 그것도 오롯이 두 사람만의 비밀로 남겨질.
 원래라면 어떻게 되었어야 하는지를 아는데, 에리나는 이 순간 만큼은 잠시 잊고 있었다. 욕심일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놓여진 행복을 잔뜩 누리고 싶었다. 이곳이라는 게 정확히 뭘 의미했던 건지는 알 수 없어도, 그래. 이곳에서라면… 지난 날 바랐던 영원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마등이 이토록 달콤한 것이라면 죽음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도 했다. 몇 차례의 움직임이 지나가고 죠나단과 에리나는 서로 맞춰보기라도 한 듯 자리에 선다. 평화를 깨트린 것은 의외의 목소리였다.

 “꿈일지도 몰라. 에리나, 아마 알겠지만…”

 이곳은 나의 세계야. 순간, 어둠에서의 목소리가 떠올랐던 것은 왜였는지 모르겠다.

 “죠나단, 당신의 세계라니….”

 소리 내어 말해봤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완전한 죽음에 이르기 전, 주마등과 같은 개념으로 미련을 가진 자가 도달하게 되는 세계라면 이곳은 자신의 세계여야 할 텐데. 재차 의문을 뱉으려던 입은 진중한 표정 앞에서 힘을 잃는다. 죠나단은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을 에리나도 알고 있었다.

 “미련…”

 …이, 그에게도 있었다는 걸까. 멈춰 선 상태 그대로 에리나가 죠나단을 응시한다. 머지 않아 죠나단이 입을 열었다.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고백들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에리나는 제 안의 무언가가 바뀌어감을 느낀다. 잡은 손을 놓치지는 않은 채로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가 아닐 텐데 느껴지는 온기가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데, 흐느낌 대신 웃음이 나와버린다니.


 영웅은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 사람은 미련을 남긴다. 그러니 죽은 것이 어떤 영웅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에리나는 자신의 것이 아닌 세계에서 앞으로를 생각했다. 과정은 달랐으나 끝은 결국 같았다. 돌아가. 당신은 살아야만 해. 이별을 앞두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에리나,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
 “어떤 건가요…?”
 “… …행복해?”

 행복해야 한다던 염원은 이제 행복한지를 묻는 소리가 되었다. 바다에 잠긴 것처럼 이어지는 정적. 죠나단은 재촉 없이 에리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손등에서 얼굴을 떼어낸 에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보이는 모습은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를 고민하는 표정 같기도 했고, 또 한 편으로는 이미 답을 정해뒀으나 내뱉기를 어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간극을 깨고 에리나가 대답한다.

 죠나단. 저는…
 절망과 고통 속에 있었어요.




 에리나를 깨운 것은 낯선 통증이다.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우렁찬 목소리.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소리 치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에리나가 가르치던 학생들 중 하나였는데, 어째서인지 엉망으로 다친 채였다. 단순히 굴렀다고 하기에는 날붙이에 긁힌 듯한 상처가 있었다. 에리나는 자신이 부상당한 상태라는 것도 잊고,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쳤구나. 싸우기라도 한 거냐…?”
 “에리나 선생님…!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에요! 아, 그,그리고 이건…”

 아이가 말을 얼버무린다. 에리나는 자세한 것을 묻기 전 이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했다. 현실인 건 확실했고, 장소는 병원인 것 같았다. 사고 직전 기억이 끊겨 누가 데려다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다면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구나. 어렴풋한 생각만 떠올리고 말 뿐. 이윽고 에리나의 시선이 다시 아이를 향한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던 아이가 물음이 생겨나기 전 먼저 반응했다.

 “그… 선생님의 사고 현장을 목격했는데, 쓰러진 사이에 주변에서 누가 금품을 가져가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흉기까지 지니고 있는 사람을 상대하는 건 위험하잖니. 차라리 그대로 넘겨줬더라면…”
 “하지만… 선생님.”

 아무리 상대가 거대하더라도, 질 게 뻔하다고 해도, 용기를 가지고 맞서야만 할 때가 있다고 가르쳐주신 건 선생님이었잖아요. 결백하다는 듯이 말하는 목소리가 있다. 굳게 다물린 표정이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경험했던 기묘한 세계 때문에 더욱 겹쳐보게 되는 것일까. 아무것도 답할 수 없게 된 에리나가 고개를 돌려 병실의 창 너머를 본다.
선생님? 부르는 목소리에 에리나는 작게 웃었다.

 절망과 고통 속에 있었어요.
 ‘그리고 희망과 안식 속에 있었죠. 때로는 불행하고, 때로는 행복했어요. 괴로워 견딜 수 없는 날이 있는가 하면 한없이 즐거운 날도 있었어요.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어지지 않는 게… 사람의 삶이라는 게, 다 그런 식이던 걸요. …’
 평범하기 그지없는, 아주 보통의 삶이었어요. 어떤 세계에서의 대답을 회고한다. 꿈처럼 흐릿해져 당시 죠나단의 표정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에리나는 자신이 걸어온 길이, 노력했던 행복이 과연 죠나단이 바라던 형태였을지를 고민한 적이 있었으나 앞으로 더는 그러지 않기로 한다. 사랑하면 닮는다는 게 이런 때에도 통용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리나 죠스타는 이것으로 전부 됐다고 말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죠나단 죠스타는 어디에도 없다. 침몰하는 배와 함께 불타버렸기 때문에. 그런데도, 죠나단 죠스타는 어디에든 있다. 불길마저도 삼키지 못한 그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에… ….
 세상이 곧 죠나단이 되었다. 에리나는 세상 속에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순간에도 별은 언제나 존재했고, 존재함을 아는 이상 에리나는 절망할 수 없었다. 창 너머의 시선이 하늘에 닿는다. 에리나는 영웅이 아닌 한 사람에 대하여 생각한다. 동시에 세상이기도 한 누군가를 머릿속으로 그린다.

 ‘사랑해, 에리나.’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에리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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