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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이정표

초승달이 뜬 그 날은 특히 별이 환하게 빛나는 밤이었다. 런던 길목 사이사이에 세워진 희미한 가스등의 불빛조차 없는 대서양의 밤은 바다도 하늘도 전부 새까말 정도로 어두워서 그 경계가 분리되지 않을 정도였다. 배의 갑판을 환히 비추는 등불을 뒤로하고 지평선을 바라보던 에리나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별이 만들어낸 길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지평선과 수직이 될 정도로 시선을 높게 고정하며 마주한 별빛은 여태 봐왔던 그 어떤 것보다도 밝게 빛나서,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혹은 별빛이 자신을 잡기 위해 끌어당기는 기분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에리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무심코 하늘로 손을 뻗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위아래를 구분하는 행위가 무의미할 정도로 광활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곧 에리나 또한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따위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그의 손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허공을 가를 때, 손가락 사이로 가장 빛나는 별 하나가 자리를 꿰차듯 들어왔다. 마치 이정표라도 되는 것처럼 눈길을 끈 그것은 어쩐지 익숙한 온기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별을 향해 아직 다 펴지 못했던 팔꿈치를 곧게 폈을 때, 에리나는 휘청이며 중심을 잃고 말았다. 그쪽이 아니라고 말하듯 잡아당기는 인력에 에리나는 자신을 덮칠 고통을 상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상상했던 차갑고 딱딱한 갑판과 달리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이 에리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조심해야지, 에리나.” “죠나단…….”
에리나를 껴안은 손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는지 넘어질 뻔한 에리나를 잡아준 죠나단은 아직 어정쩡하게 들려있는 그의 손을 쥐며 아래로 잡아 내렸다. 자신이 허공을 팔을 휘적거린 것도 봤을까 하는 생각에 에리나는 낯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빨개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에리나는 여전히 죠나단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죠나단은 에리나의 동그란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잡고 있던 손가락 사이에 제 손을 꼭 맞물리며 깍지를 끼곤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에리나, 이제 나 좀 봐주면 안 돼?”
관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붙어오는 죠나단의 모습에 에리나는 풋하고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제야 제가 건넨 말이 민망한지, 죠나단은 귓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아…그러니까……'하며 의미 없는 변명을 붙이려다 말끝을 흐렸다. 에리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아보려 했지만, 그 배려에 죠나단은 얼굴을 들고 있기 더욱 힘들어졌는지 더듬거리며 말을 뱉던 입도 꾹 다물곤 에리나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에리나는 소리 없이 웃으며 그런 죠나단의 모습에 8년 전, 나무에 그들의 이름을 새기며 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에리나는 여전히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죠나단과 깍지를 끼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죠나단도 어느 정도 표정을 갈무리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에리나와 눈을 맞췄다. 밤바다 색과 꼭 닮은 머리카락과 함께 떨어진 온기에 조금 아쉬움을 느낀 에리나는 몸을 돌려 죠나단의 품에 고개를 묻으며 그를 마주 안곤,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정말 아름다운 밤하늘이야." "그래. 별이 정말 밝아서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잡힐 것 같아."
죠나단의 말에 방금 행동이 다시금 떠오른 에리나는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혹여나 자신을 놀리는 건가 하는 마음은 죠나단과 눈을 맞추자마자 확신으로 바뀌었다. 에리나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샐쭉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죠나단을 쏘아보았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조명과 사람이 모여있는 갑판 쪽에서 흘러드는 희미한 노랫소리와 함께 서로가 호흡을 들이쉬는 소리만이 주위를 울렸다. 분명 지금 이 순간을 더없이 평화롭다고 느낄 거라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생각이 웃음소리 사이로 흩어졌다.
"어린아이 같겠지만… 그래. 어떻게 손을 뻗지 않을 수 있겠어? 저렇게 밝게 빛나는걸." "물론. 당신을 놀리려고 했던 건 아니야. 나도 동감해."
죠나단은 허리를 숙여 자신을 올려다보는 에리나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에리나는 제 이마에 닿는 온기가 너무나도 조심스러워서 오히려 그 숨이 곧 꺼져버릴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별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던 것처럼 그의 남편을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한건지 죠나단은 에리나의 얼굴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아무말 없이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둘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어느새 아득하게 들리던 음악도 사라져 에리나의 귀에는 죠나단의 심장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한 죄수는 진흙탕을 보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의 죄수는 철창 너머로 별을 보고 있었다.’
순간, 울림 사이로 죠나단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은 너무나 다정하고 강인한데, 동시에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져 분명 아주 가까이 있음에도 에리나는 죠나단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파도가 저희 사이를 가르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대신 에리나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온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리나, 당신은 무얼 보고 싶어?"
죠나단이 물었다. 에리나는 죠나단의 손을 힘주어 잡은 채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봤다. 분명 자신의 눈앞에 있는데 에리나는 잠시라도 그를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이 눈빛에 흔들림이 생기면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았기에, 아니, 자욱한 구름에 가려져 볼 수 없게 될 것 같았기에.
"죠나단, 물론 나는 별을 보겠어.” "나도 당신이 그러길 바라."
에리나가 대답했고, 죠나단이 미소지었다. 에리나는 묻고 싶었다. ‘당신은? 죠나단 죠스타는 무얼 볼 거야?’ 하지만 에리나는 그 물음을 입에 담을 수 없었고, 그래서 죠나단도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죠나단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아내에게 입을 맞췄다. 서로의 시선이 가까이서 얽혔고 에리나는 먼저 눈을 감았다. 곧 둘의 입술이 떨어지고 죠나단이 에리나로부터 한 발자국 멀어졌다. 에리나는 죠나단을 다시 잡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죠나단, 에리나가 그의 남편의 이름을 담으려고 했을 때였다. 순간 시야가 흔들렸고, 멀어지는 두사람 사이로 큰 소음과 함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배를 흔적도 없이 집어삼키려는 듯 커지는 불길에 잿빛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에리나는 죠나단을 향해 가고 싶었지만 그의 등은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 나무가 타오르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사이에 희미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호흡을 옥죄는 기운에 에리나는 금방이라도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으나 죠나단 죠스타를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죠죠, 에리나는 간신히 그를 불렀다. 어린 시절 이후로는 부르지 않았던 그의 별명이었다. 그 부름을 들은 것인지 죠나단은 잠시 멈춰 섰지만 에리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에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 손길을 따라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은 배의 중심지에서부터 피어오른 매연에 빼곡히 가려져 있었다. 빛 하나 없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전부 삼켜버린 것의 원흉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남편, 죠나단 죠스타를 향해 에리나는 묻고 싶었다. 당신도 별을 볼 거야? 죠나단. 나는, 당신이……. 채 가려지지 못한 공간에 하나의 별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아까 에리나가 잡으려고 했던 것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이 유일했기에, 가장 빛나는 별을 향해 에리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에리나는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하나의 염원을 손안에 담으며. 에리나는 꾹 주먹을 쥔 채, 마지막으로 다시 죠나단 죠스타를 바라봤다.
에리나는 눈을 떴다. 익숙한 약품 냄새가 났고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그는 곧 방금까지 자신이 그날의 꿈을 꿨으며 이곳이 병실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1889년 2월 7일, 죠나단 죠스타가 사망한 뒤 꼬박 이틀 동안 에리나는 갓난아기와 함께 망망대해를 표류했다. 기실 실제보다 더욱 길게 느껴졌던 이틀에 그 배에서 있었던 일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여인과 아이 둘이 성인 남성 하나를 겨우 태울 수 있는 관과 같은 상자에만 의지해 바다를 건넌 것을 보고 사람들은 기적을 논했다. 제게 배려없이 물어오는 낯선 질문들이 떠올랐다.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그 소음만큼은 너무나 선명해서 배가 고장 날 때 나던 소름끼치는 기계음을 떠올리게 했다. 에리나는 막연해지는 정신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리운 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에리나는 그 울음의 주인을 기억해냈다.
죠나단 죠스타, 그리고 에리나 죠스타의 용기.
자리에서 일어난 에리나는 침대 옆에 놓여있는 요람 속으로 손을 뻗었다. 조금은 낯설지만 이젠 익숙하게 아이를 달래는 동작에 에리나는 타인에게 비춰질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하며 작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 웃음에 뭐가 좋은지 품에 안긴 아이도 천천히 울음을 그치더니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의 품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온기에 에리나는 정말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곧 그들의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에리나를 찾아올 것이고, 배 위에서 막을 내린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야할 것이다.
'에리나, 당신은 무얼 보고 싶어?'
여즉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에리나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에리나는 별을 보겠노라 대답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그다음은 어땠지? 흐릿한 기억 속에서 에리나는 죠나단의 대답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아니, 자신이 그에게 정말 물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방금까지 선명하게 들려오던 그의 목소리는 마치 물에 잠긴 듯이 멀어져갔고, 자신이 돌아온 지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아득히 오래전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에리나는 꿈속에서처럼 두렵지 않았다. 그 대신에 에리나는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품었다.
죠나단, 당신은 어땠어? 마지막에 별을 보고 있었어? 이 질문의 대답을 당신으로부터 들을 수 없겠지. 그때 나는 마지막까지 당신을 보고 싶었어. 내 세상에서 가장 빛나던 별을. 그래서 당신을 내 품에 안고 꺼져가는 당신의 숨결과 닿아있으면,
죠나단 죠스타라는 별과 함께 연소하여 빛날 수 있는 것 같았어. 나의 별은 당신인데 당신은 항상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아서
이렇게 당신과 함께 타오른다면 당신과 같은 것을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바랐던 것 같아.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시선의 끝은 이런 나의 생각이
정말 바보 같았다는 것을 깨닫게 했지만 말이야. 죠나단. 더는 당신에게 물어볼 수 없겠지만 지금은 알 수 있어. 당신은 항상 별을 본 거야. 정말 작지만 아름다운 생명의 빛을 품고 있는 별을.
에리나는 자신의 품에 안긴 어린 생명을 바라보았다. 둘밖에 없는 조용한 방 안이 두 명분의 심장 소리로 채워졌다. 이 순간이 더없이 평화롭다고 느껴져서 에리나는 쏟아져나오는 감정을 막아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에리나는 그들의 소식을 들은 스피드왜건이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문을 박차고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건 나의 작은 욕심이지만. 죠나단, 나는 당신이 에리나 죠스타라는 별을 봐주었기를─.
그리고 그 울음 사이에 하나의 염원을 담으며, 에리나 죠스타는 작게 미소지었다.
마지막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자신을 곧게 바라보던 푸른 빛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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