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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조

두 계절의 사랑


영원한 것은 없다고 또다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적어도 에리나는 더 이상 영원을 믿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어렸을 때에는 분명 아버지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그 전날 어머니와 기쁜 마음으로 어떻게 눈사람을 꾸며줄지에 대해 따뜻한 이불 속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이제 잔상만 남고 자신과 그의 부모 둘 다 여유가 없다는 사실에 에리나는 겨울이 싫어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주 어렸을 때처럼 눈사람을 만들다 관두고, 철없게 벌러덩 눈 위에 누워 팔다리를 휘젓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면서 부모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번 겨울을 처음으로, 에리나의 겨울은 따뜻하지 않았다.

가요를 들어도 신나지 않았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재미있지만 그때가 끝이었다. 공부가 뭔지, 꿈이 뭔지. 해내고 싶은 게 뭔지, 성적이 뭔지. 뛰어나게 외향적이지 않은 그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일 년 동안 함께 지냈던 친구들과 찢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라는 대로 온순하게 기다리지 않았다.

방학이어도 학교에 나와야 하는 지루함을 돌파하고 싶은 마음이 에리나의 공부를 방해했다. 그럴 수록 에리나는 의대에 진학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실력이 뒤처질까봐 두려워했는데. 아예 하루 정도 쉬어야겠다. 쉬고 나서, 다시 공부를 하는 거야. 결심한 다음 곧장 자습 1교시에 선생님에게 억지를 부려 조퇴하였다. 에리나의 첫 일탈이었고, 선생님은 평소 에리나가 행실이 좋은 학생이라는 아주 흔한 이유로 그의 조퇴를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자 부모는 그를 반기었다. 에리나는 그 하루를 아주 행복하게 보냈다.

그동안 밀렸던 방을 정리하기. 먼지 쌓인 인형들을 털어주기. 읽고 싶었던 소설을 읽기. 학교가 얼마나 지루한지 부모에게 투정 부리기. 그리고 위로받기. 에리나는 자신과 닮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나눌 때, 온전한 휴식과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기 전에 에리나는 침대에 누워 내일의 학교생활을 고민했다. 교실은 이상하게 집중이 잘 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뭘까?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모두가 다르다. 크게 나누면 공부를 하거나 하지 않는 부류가 있겠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본다면 기계처럼 공부를 하는 사람과 자신의 의지로 펜을 드는 사람이 있겠고, 표면적으로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 중 하나는 자신의 의지로 공부를 하였다가, 몰아치는 학습량과 부족해지는 수면으로 조는 사람과 아예 자고 싶어서 자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에리나는 자신에게 질문이 생겼다. 나는 어떤 부류일까. 공부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최근 부쩍 기계적으로 지식을 머릿속으로 욱여넣는 느낌이 있는데. 최근에 즐거워했나? 나는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

에리나의 질문의 꼬리는 길고 길었지만, 간만에 그의 몸을 가득 채운 아득함과 평안이 이끈 수면은 그와 그의 고민에 다정히 함께 이불을 덮어주었다.




꿈을 꾸었어
다정하고 다정한 내용이었지만
기억나는 것은 없고
다만 조용한 장소가 나는 편안하구나
기왕이면 따뜻하면 더 좋겠구나
나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된 꿈이었어
꿈을 꾸었어
그리고 어쩌면 간절하게 좋아하는 것은
영원해




아침에 일어날 때 어깨가 평소보다 가벼웠다. 학교 가는 길이 싫지 않았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오랜만에 반가울 지경이었다. 지나치는 담벼락 벽돌 사이사이에 끼어든 눈송이를 가만 관찰할 시간도 여유로웠다. 그래, 에리나가 겨울을 사랑했던 이유가.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아도 함께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주는 장면이 많았다. 어느 누구도 밟지 않은 눈밭에 찍혀있는 새의 발자국, 고양이의 발자국, 개의 발자국. 이미 가버려 없지만, 분명히 그곳에 존재한 것들. 에리나는 학교에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쩐지 친구들에게 어서 인사하여 하루를 열고 싶었다.

학교에 가는 길 위에서, 에리나는 문득 자신과 친한 보건 선생님을 떠올렸다. 보건실은 따뜻하니까. 선생님께 부탁드려보자. 에리나는 권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으로 공간의 변화를 시도했다.

“안녕 애들아.”

다정하고 부드러운 인사로 교실을 채운 뒤 에리나는 공부할 책과 필통과 귀여운 무늬의 담요까지 챙긴 뒤 친구들에게 자신은 보건실에서 공부할 것이라는 선언을 하고 교실을 나섰다. 차피 방학이라, 선생님들의 감시는 심하지 않았다.

보건실의 문이 열릴 때, 보건 선생은 또 애들이 교실에서 도망 나와 별별 핑계를 늘어뜨리며 자러 왔구나 하며 의자를 돌렸다.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는 학생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너무나 익숙한 학생이었다. 평소 에리나는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한 질문을 당장 해소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길 때마다 보건실에 들러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곤 했는데, 비록 선생님이 의사는 아니지만, 기본적인 의학 상식을 가지고 있어서 결정한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보건 선생은 빛을 받으면 부드러운 벨벳 같은 금발의 학생을 잊을 수 없었고 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에리나? 교실에 있어야 하는 시간 아니니? 어머. 혹시 어디 아픈 거야?”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 이번 방학 동안 보건실에서 공부하면 안 될까요? 부탁드려요.”

간결한 부탁이 정말 에리나 같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일부러 애교하거나, 앙탈을 부리는 면모가 없는 게 에리나스러웠다. 깔끔하고, 예의 바른. 선생은 재량껏 에리나의 바람을 허락했다. 그리고 머그컵과 커피포트를 편하게 사용하라고 사용법도 알려주었고, 숨겨두었던 핫초코 통의 위치도 알려주었다.

반쯤 안 될 것이라고 마음먹고 찾아간 보건실에서 에리나는 또 다른 형태의 애정을 느꼈다. 쌓아온 신뢰가 선물하는 선의. 선생이 학생을 위해 자신의 휴식을 포기하기란 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에리나는 진심을 담아 선생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었고, 최대한 조용히 보건실 안쪽에서 공부할 자리를 마련하였다. 생각처럼 보건실 안은 따뜻하여 자칫 졸음이 쏟아질 수도 있겠지만, 감사한 사람과 함께하는 공간에서 에리나는 졸 수 없었고 그 덕에 책에 나열된 글자가 눈에 더 잘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보건실 안은 선생이 업무처리를 하느라 두드리는 타자 소리와 에리나의 연필이 마모되어 종이에 쌓이는 사각거림, 그리고 이 둘의 호흡으로 완성되었다.




겨울 방학의 반이 지났다. 반복의 일상이었지만 교실에서의 반복과 보건실에서의 반복은 차이가 극명했다. 가장 기쁜 소식은, 에리나는 자신이 계획했던 공부를 방학이 반이나 남은 시점에서 끝냈다.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에리나 자신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나 무엇을 해내었다는 사실은 자존감을 위한 아주 건강한 양분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오늘, 에리나는 하루동안은 힘을 빼기로 했다.

어깨에 힘을 빼기, 목에 힘을 빼기, 손에 힘을 빼서 연필도 잡지 못하게 하기. 다만 좋아하는 책을 넘길 수는 있게 힘을 유지하기. 그리고 생각에서도 힘을 빼기. 힘을 빼고 보건 선생님과 즐거운 시간 보내기. 손깍지를 끼고 위로 쭈욱 뻗기. 그대로 양옆으로 허리를 늘리기. 기분 좋은 이완이었다. 눈을 감아 안구를 데구르르 안에서 굴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가져온 간식을 선생과 나눠 먹기 위해 준비하려는 순간 정적이 깨졌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조심스러웠고, 큰 소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문은 살짝 위쪽으로 들려 열렸다. 에리나는 이 작은 소란을 조금 미워했다.

“저기, 선생님……. 제가 팔꿈치가 쓸려서요…….”

엄청 큰 사람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고나서 에리나는 당황했다. 왜냐하면, 에리나는 평소에 사람의 외관을 가지고 첫인상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인데, 정말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거대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고개를 숙이고 보건실에 들어와야 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는 심지어 들어온 남자의 크기 때문에 이미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죠나단. 학교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1학년 복도에 있으면 혼자만 우뚝 솟아 나 있다. 에리나는 그래도 나름 첫 대면이니 친절하게 웃으며 간식을 책상 아래로 숨겼다.

“선생님이 지금 안 계시는데. 어쩌지.”

“아……. 그래요? 어쩌지. ”

“많이 아파요?”

에리나는 죠나단을 알아 말을 편하게 했는데, 죠나단은 그를 몰라 격식을 차린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에리나도 덩달아 도로 존댓말을 사용하며 답하게 되었다. 에리나는 이러한 상황이 혼자서 머쓱하다고 느껴졌다.

에리나가 보건실에서 공부를 하면서 공부 외에 새로 배운 것이 있다면 간단한 응급처치였다. 물론 보건 선생이 그를 믿었기 때문에 알려준 것이었고, 가끔 선생이 자리를 비웠을 때 에리나는 그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에리나는 죠나단에게 많이 아프냐는 질문을 했다. 상태 파악의 목적으로.

같은 순간, 죠나단은 머리가 멍해졌다. 귓가에서 종소리와 닮은 이명이 끝없이 시작되었고, 자신이 어떠한 방법으로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이 입 밖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쩐지 제멋대로 그의 가슴팍에 있는 명찰로 시선이 가선 빠르게 그의 에리나라는 이름을 훔쳤다.

“아파서……. 좀 있다 가야 할 것 같아요.”

조금 더 떨지 않고 말할 수 없었는지 죠나단은 후회했다.

“그러면 여기 앉아봐요.”

서로가 모르는 서로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둘은 이성이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죠나단은 에리나가 시키는 대로 자신의 몸보다 작은 간이 의자에 앉았고, 에리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소매를 걷어 올려 피부가 벗겨진 팔꿈치를 살펴보았다.

보건실의 블라인드는 내려와 있지 않았고, 고도가 낮은 태양에 의해서 보건실에는 기다란 그림자들이 얇게 얇게 겹쳐져서 어롱거렸다. 죠나단의 상처를 처치해주며 에리나는 눈을 껌뻑였다. 그의 머리 위에서 그의 빨간 팔꿈치만 눈여겨볼 생각이었는데. 뺨에 진 그늘이, 그늘을 만든 속눈썹이, 약을 바르느라 쓰라림에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홀연하게 바라보았다. 등교하며 봤던 눈송이가 떠올랐다. 그의 속눈썹 위라면 충분히 눈송이가 쌓일 듯만 같다고. 길고, 곱다면서.

“저기.”

그리고 두 눈 사이에 위치한 곧게 뻗어있는 콧대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에리나?”

“어?”

자신이 어디까지 생각했더라. 에리나는 자신의 이름이 갑작스럽게 좋은 음성으로 불려 당황하였고, 죠나단은 자신에게 약을 발라주는 그가 아까부터 같은 위치를 반복하여 건드리는 것 같아서 이름을 불렀다.

갑자기 알려주지 않은 이름을 불러서 놀랐으면 어쩌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몇 학년일까? 내가 죠나단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죠나단도 나를 알고 있었나? 왜 다들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을 시간에 보건실에 있을까? 목소리가 좋은 것 같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다리가 풀릴 만큼의 당혹—당시 에리나가 정의한 바로는—에 급히 에리나는 옆 책상을 짚고, 두 다리로 꿋꿋하게 서 있길 노력했다. 죠나단은 자신을 불편해하는 듯하는 모습에 반사적으로 손을 머뭇거리며 올려 손사래를 쳤다. 어쩌지. 자주 그러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가끔씩 죠나단은 자신의 큰 몸을 탓할 때가 있었다.

“명찰에, 명찰에 이름이 쓰여 있어서 불렀어요. 그, 아까부터 같은 곳만 치료해주시는 것 같아서…….”

“……. 어떡해. 많이 아팠어?”

답 대신 고개를 저으며 아님을 표현했다. 죠나단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들어 마주하여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올려서 웃었다. 그리고 그제야 둘은 서로의 두 눈을 제대로 마주 보게 되었다.

밴드를 꺼내 팔꿈치에 붙이고 간단한 치료가 끝났지만 죠나단은 작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이름까지 알게 된 거, 말을 더 나누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에리나가 혼자 있는 동안 보건실을 채운 그의 향에 잠시 마음이 젖은 것일 수도 있겠다. 죠나단은 빤히 제 머리 위에 있는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뻐끔거리다가 입을 뗐다. 가장 궁금했던 것으로. 몇 학년이세요?

에리나는 무방비 상태였다. 마음이 편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끝없이 진정으로 마음을 편하게 느끼는 집 밖의 낯선 것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설마 무엇이 더 있을까. 집에서 가져온 아끼는 과자, 좋아하는 책들, 창을 투과하는 빛, 온통 집에서 가져온 한정적인 물건 속에. 1학년이에요, 너와 같은 학년이야, 등 그의 질문에 알맞은 답이 다양했지만 에리나는 이상한 답을 하였다. 에리나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나는 죠나단 너를 알아. 에리나는 에리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뭔지 몰랐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에리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긋난 답으로 일어나는 일들도 있었다.

죠나단은 어쩐지 그 답이 너무 기뻤다. 사실 에리나에 대해서 학년이라든지 정보 값이 딱히 간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긋난 답으로 일어나는 일들도 있었다.

죠나단은 어쩐지 그 답이 너무 기뻤다. 사실 에리나에 대해서 학년이라든지 정보값이 딱히 간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죠나단이 팔꿈치를 다치고난 시점으로부터 다음날, 그는 또다시 보건실을 찾아왔다. 그 전날보다 조금 더 깔끔한 교복 모습으로. 그때 보건실에는 선생과 에리나 둘이 함께 있었다.

전날 에리나가 보건실에 있는 이유를 알게 된 죠나단은 그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에리나가 그랬듯, 죠나단도 등굣길에 보건실에서 공부하기를 결심했다. 물론 직후에 보건 선생의 허락이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막연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의 행동력은 강했고, 무례하지 않았다. 보건 선생도 죠나단의 공부를 허락했다. 죠나단은 그때 에리나가 어떠한 표정을 짓고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단지 선생의 허락에 기뻐 미처 살피지 못하였지만 에리나는 눈을 크게 떴고, 그다음으로는 입을 꾹, 꾹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기쁘다. 죠나단에게 언젠가 말할 수 있겠지. 함께 공부할 사람이 생겨서 기쁘다고. 네가 나 때문에 보건실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한 것 같아서 기쁘다고. 물론 보건실이 따뜻하고 좋은 향이 나니까 공부가 잘될 것만 같아 왔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기쁘다고. 방학은 며칠 남지 않았지만, 그동안 함께 열심히 하고 싶다고. 많은 상상, 생각. 말이 많지 않은 에리나의 머릿속은 겉과 다르게 수다쟁이가 되었다. 하지만 죠나단에게 기쁘다, 한마디 하지 못하고.

둘은 결이 비슷했다. 인상도 비슷하였나. 그만큼 큰 어려움 없이 겹칠 수 있었다. 둘의 친근함은 또래의 친구들의 친함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허공을 의미 없이 떠돌아다니는 욕설보다는 서로가 각자의 일상을 살면서 좋다고 여긴 개인적인 것들을 구사한 언어를 교환하기를,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몸을 힘을 실어서 때리는 것보다는 닿지 않고 거리를 좁혀가며 서로의 표정을 관찰하기를 선택했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은 마음을 나누며 함께하는 시간을 탐닉하였고, (비록 같은 공간에서 그만큼 시간도 함께 많이 보낸 보건 선생은 어쩐지 배제되었지만) 순간만큼은 둘이 동시에 둘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행복하고 안정해.

하루는 마음도 배부르고—원인은 에리나가 잔뜩 챙겨온 초콜릿 쿠키— 몸은 따뜻하고 햇빛이 뺨을 때리더니 죠나단은 졸렸나보다. 에리나가 하는 말에는 꼬박 꼬박 응, 으응, 하며 답을 했지만 죠나단의 사고가 둔해져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부드러운 에리나의 목소리는 받아들이고 정작 내용은 들어오는 족족 밖으로 흘러나갔다. 그래서, 죠나단은 에리나가 아주 사랑스럽게—그 때의 심상으로는—재잘거리는 모습만 잔뜩 끽하는 것이 되었다. 잠이 너무 쏟아진다. 내가 이러는 걸 에리나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는데. 나는 지금……. 어쩌면 무례할지도 모르겠다. 죠나단의 정신을 잡게 해준 것은 에리나에게 무례해지고 싶지 않은 욕심이었고 죠나단은 차라리 그에게 잠시 눈을 붙이겠다고 말을 한 뒤, 아예 책상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

그런 그를 옆에 두고 해야 할 공부를 계속해서 했으면 됐을 텐데. 아마 죠나단이 조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지. 잠들 때의 얼굴은 어떨까. 에리나는 쥐고있던 펜을 내려놓고, 죠나단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미 낯설지 않고 익숙해진 상황에서 문득 첫 만남이 떠오른다는 것은 어떠한 방향으로의 암시일까. 자신의 팔을 베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색, 색 숨을 쉬는 죠나단과 가장 첫 만남 때, 자신의 아래에서 눈을 감고 치료받던 죠나단이 겹쳐 보였다. 몇 주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스러운 것인데도 여전히 그의 콧대와 짙은 속눈썹이 여전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이 속눈썹에는 눈꽃이 아니라 작은 벚꽃이 앉을 수 있을까. 벚꽃 아래의 죠나단은 어떨까. 벚꽃보다는 차분한 등나무가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 생각에 잠기며 에리나는 죠나단 옆에서, 자신과 그 사이에 거울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와 반대 팔을 베고 그를 바라보아 엎드렸다. 다른 것이라곤 에리나는 눈을 떠서 겨울 보건실 안의 죠나단을 볼 수 있었고, 죠나단은 눈을 감아 꿈의 에리나를 볼 수 있었다.

새 친구가 생겨서 들떴구나. 그가 좋은 사람 같다. 에리나는 이제 곧 다가올 2학년 생활을 죠나단과 같은 반이 되어 보낼 수 있다면, 어쩐지 이번 겨울과 같은 권태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죠나단과 같은 반이 되었으면 좋겠어. 에리나는 죠나단이 눈을 뜨면 이 말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너무나도 곤히 잠든 탓에. 그리고 잠든 모습이 퍽 귀여운 탓에 에리나는 저도 모르게 죠나단의 머리에 손을 댔다. 둘 사이에 지켜왔던, 아니 어쩌면 서로 너무나 조심한 탓에 넘지 않았던 기준을 에리나가 먼저 넘었다. 잠들었을 때 누군가의 토닥임이 잠을 더 편하게 들게 했다는 경험을 근거로 하여서. 죠나단의 눈가를 간지럽히는 앞머리도 손으로 넘겨주기도 하였고, 또 부드러운 머리카락으로 덮인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다정하게. 똑같이 엎드려 그를 바라보면서. 진부하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낯설게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와 있을 때는 아주 낯설게도 감정이 넘쳐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이 멈춰진 시간 안에서 깨달았다. 감정이 넘친다. 그리고 그 감정의 정체는 어쩌면, 어쩌면. 발끝과 손끝을 뭉툭한 바늘로 콕, 콕 찌르는 느낌이 에리나를 간지럽혔다. 목덜미에서부터 천천히 열이 퍼지는 듯함이, 그런 모든 감각과 감정들이. 에리나는 계획에 없었던 이 감정에 대한 정의 내리기를 미룰 수 없었다.

죠나단이 눈을 떴다. 그리고, 그날은 방학의 마지막 날이었다.




3월은 바쁘게 지나갔다. 2학년의 첫날, 에리나는 최대한 감정을 다스리며 심통부리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속으로 앓는 부분이 있었다. 죠나단과 같은 반이 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에리나를 약간은 속상하게 만들었던 것 같았다. 개학 전, 그와 함께라면 일 년을 또다시 잘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면 반드시 반대되어버릴 것이라는 은은한 압박도 있었다. 죠나단과 같은 반이 되지 못하였으니 잘 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며. 그럼에도 에리나는 여전히 꾸준히 일상을 살아가기로 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 새로운 선생님을 파악하기.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학급 일을 정돈하기. 몇 주간 조용한 생활을 하였으니 교실의 시끄러움에 당장 적응하기까지에는 많은 신경이 소비되고 스트레스는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힘들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꾹 참아내고 화내야 할 일도 아니었기에 은은하게 웃으면서 바쁜 3월을 보냈다.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이루고 싶은 미래를 위해 방학 동안 깊게 사귀었던 우정을, 다정함을 확인할 수도 없었고 한정적인 작은 사각의 교실에서 3월은 그렇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4월이 되었고 그제야 조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자 에리나는 자신의 사각의 교실 밖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막혀있는 네모난 교실에서 시선이 그 너머로 확장되었을 때, 사무치는 외로움이 에리나의 밤을 장식했다. 꼭 세상이 한순간에 넓어진 것처럼, 그 넓음을 채우는 자신의 면적이 작은 것처럼 외로웠다.

세상은 넓어졌지만, 아직 막혀있는 모서리 안에서, 모서리 밖을 볼 수 있는 창가에 앉아서, 슬슬 따뜻해지는 봄볕을 맞으면서, 에리나는 지금까지의 생활을 더듬어보았다. 주변에 늘 사람이 많았고, 지겨울 틈 없이 바빴지만 왜 자신이 지금 외로움을 느끼는가에 관하여. 기억을 더듬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답을 낼 수 있었지만, 에리나는 어쩐지 그러면 모두가 즐겁게 떠들고 있는 이 교실 안에서 홀로 얼굴을 붉히는 그런 상황이 되어버릴까 봐 그러질 못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지금 생각하는 답을 낸다면……. 내가 미쳤지. 마른세수를 해야만 했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같을지 몰랐다. 그리고 이 둘이 같아졌을 때는 원인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3월을 어떻게 보냈더라.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지만 하지 못하고 넘긴 것들이 많았다. 반 배정 결과를 보았을 때 죠나단과 같은 반이 되지 못해서 아쉽다는 말. 아니 그 전에 같은 반이 되고 싶다는 말도 몰아치는 당황으로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가 몇 반인지는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반과 꽤 떨어져 있어서 찾아갈 수 없었다. 복도에서 마주쳤어도 둘 다 목적지가 뚜렷한 상태에서 바쁘게 지나갔기 때문에 간단한 인사를 겨우 했으면 다행이었고. 죠나단을, 죠나단을. 그래, 죠나단과 시간을 보낼 수 없어서 그리웠고 외로웠다. 죠나단도 저만큼 많이 바빴을까. 먼저 찾아오지 못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었지만, 마음은 욕심을 품고 있었다. 무언가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새 친구’, ‘순위’ 같은 단어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보통은 다들 그러지……. 그도 새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바빴겠지. 차마 왜 먼저 자신의 반에 찾아와주지 않았나 탓할 수 없었다. 자신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러다가 아예 자신의 반을 모르는 상태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다랐을 때 에리나는 그렇게 눈 한 번 질끈 감고 생각을 마쳤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서로의 감정이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의 불안함
그럼에도 다시 본다면 다정할 것이라는 확신의 안정
안절부절못함
좋아함
확신하기




4월 말에 접어들고 등나무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할 즈음에도 학교는 여전히 떠들썩하였다. 특히 중간고사로 떠들썩해졌는데, 중간고사 날짜의 확정은 동시에 에리나가 어떠한 결심을 하도록 만들었다. 기점이 되어서 기준이 되도록 하였는데, 그러니까 에리나는 중간고사 마지막 날을 기준으로 당장 죠나단을 찾아가길 결심했다. 이상한 일이 아니야. 왜냐하면 죠나단과 나는 친하게 지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원하니까.

대신 에리나는 침대 위에 머리를 늘어뜨리고 이불 위에 부유했다. 핑계는 지금까지 공부를 계속했으니 잠시 쉬겠다는 명분으로. 우선 해야 할 것을 해야겠지.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이었더라. 공부. 그리고, 아. 고백. 하지만 고백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무엇보다 죠나단은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에리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1월 말의 겨울처럼 말끔해졌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되는 거였어. 당장은 공부가 바쁘고 공부가 중요하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내가 이루고 싶은, 의사가 되는 꿈이 소중하니까. 시험을 잘 보고 나서 기쁜 마음으로, 기쁜 마음에 또 기쁜 마음을 더해서 죠나단을 찾아가면 됐다. 웃는 모습을 가지고, 시험이 끝나자마자 그의 반으로 먼저 찾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가 반겨주지 않는다면, 다시 방학 때 친해졌던 것처럼 다시 친해지면 되는 일이었다. 그만큼, 에리나는 죠나단이 좋았다. 그의 다정을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새.






달려가는 중이다. 모든 시험이 끝났다. 학생들이 흐르듯 학교에서 빠져나간다. 행여 그중에 죠나단이 있을까 봐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가 있다면 다른 사람 머리 위에 그의 머리가 있을 테니까, 어떤 거대한 사람이 보이지 않음에 안심하면서도 안심하지 못하면서도 이미 가버렸을지도 모르는, 확인 불가의 양자성이 마음을 흔드는 것인지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 위한 준비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인지. 에리나는 생전 그러지 않았지만, 복도에서 꽤 빠른 걸음으로 복도 끝에 있는 죠나단에게 달려가는 중이다.

그리고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죠나단의 반에 도착하였을 때. 그때. 시간이 멈추었을지도 모르는 그때. 학생들이 모두 급류처럼 작은 문으로 학교 밖으로 빠져나간 탓에, 아니 덕에.

창밖에는 벚나무가 우수수 꽃잎을 떨어뜨리는 중일 때. 죠나단 홀로 교실을 정리하고 있을 때.

“죠나단!”






* 현대 고등학생 AU
* 보건 선생님은 스피드왜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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