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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나

별의 약속



에리나가 이사를 온 뒤 옆 집에 살던 에드워드는 그녀가 16살이 되던 해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광장에서 다짜고짜 큰 목소리로 무릎을 꿇으며 반지를 건넸다. 대학 동기였던 필은 공적인 자리인 가족 모임에서 불쑥 꽃다발을 내밀며 청혼했다. 에드워드에겐 싫어. 한 마디하자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은 채 멍하니 서 있다가 돌아간 이후 연락이 끊어졌으며, 필에게도 거절하자 그는 노발대발하며 부모님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했다. 계속 두고 보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옆에 있던 지팡이로 두들겨 패자 울면서 나갔다.

프러포즈라고 하지만 그 둘의 행동은 7년 전 강가에서 유치한 짓거리를 하던 소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휘두르려 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욕을 주었으니까. 그렇지만 에리나가 그들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는 그들이 무례했던 탓도 있었지만 긴 시간 동안 변함없이 마음 한 켠에서 떠나지 않는 이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평생을 홀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워지지 않은 깊고 따뜻한 기억을 감히 떨쳐낼 수 없었다. 어쩌면 기적처럼 다가와 주길 바랐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마 오늘이 그 오래도록 기다리던 날이었나 보다.


에리나. 시간이 된다면 오늘 저녁을 함께 하지 않을래? 독특한 모자를 쓴 남자를 따라간 이후 다시 돌아온 죠나단은 제일 먼저 에리나를 만나러 갔다. 그의 긴장한 것 같은 말투, 맵시 있게 한 쪽으로 정리한 머리, 근사하게 차려 입은 남색의 정장을 보고 에리나는 저녁 식사 후 자신이 들을 말을 직감했다. 좋아요. 긍정적인 대답에 죠나단은 아이처럼 기뻐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꼭 잡아주었다. 두툼한 손길은 조심스러웠으며 그의 눈빛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을 보는 양 반짝였다.

그의 손길을 따라 걸음한 레스토랑은 상당히 규모가 컸지만, 사람이 많지 않아 고즈넉했다. 홀 전체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어 부드럽게 눌리며 거슬리는 구두 굽 소리 없이 사박거렸다. 향기로운 음식 냄새와 도란도란한 말 소리. 우아한 샹들리에 아래로 조명이 번지듯 일렁였다. 조용하지만 은은히 퍼지는 재즈 음악이 깔린 홀을 거닐며 죠나단은 에리나를 창가로 데려갔다. 야경이 잘 보이는 발코니 너머의 빛이 쏟아지듯 물결치는 거리의 풍경에 홀린 듯 바라보자 지켜보던 죠나단은 입가에 미소를 올리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큼, 하고 헛기침하던 에리나는 메뉴판으로 얼른 눈을 돌렸다.

가격이 꽤 비싼데 괜찮은 걸까.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노라면 죠나단은 미간을 좁힌 채 덩달아 죽 늘어선 요리의 나열을 훑고 있었다. 미안, 자주 시킨 적이 없어서 뭐가 맛있는 지 잘 모르겠어. 에리나.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정하자. 티 없는 건지 그냥 맞춰 주는 건지. 마냥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입고 온 치맛단을 꾹 구긴 채 메뉴를 고르고는 긴장을 벗으려 애를 써보았다.


“의사가 되었다는 걸 들었어. 멋진 일을 하고 있구나.”


음식을 기다리다가 죠나단이 먼저 말을 붙여 왔다. 그래, 생각해 보니 조용히 마주 앉아 대화하는 건 재회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버지를 따라간 것뿐인 걸요, 죠나단은 대학을 막 졸업한 것까진 들었는데 어떤 전공이었나요? 나는 고고학과야. 나도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라는 걸 듣고 파고 들고 싶었거든. 어머, 꽤나 생소한 분야네요. 그럼 고고학이면 직접 유물을 발굴하러 돌아다니기도 하나요? 한 번 말이 트이자 죠나단은 조용하지만 침묵이 길지 않게, 듣기 좋은 톤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메뉴가 차례로 나오자 죠나단은 에리나의 몫이 담긴 스테이크 접시를 잠시 가져가더니 손수 썰어주고 돌려주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깔끔하게 잘린 단면을 보고 에리나는 수줍게 고맙다고 대답했다. 12살에 서로에게 물을 튀기며 놀던 시절의 그는 당시의 그가 목표로 했던 의젓한 신사가 된 것 같아 괜스레 성장한 그를 자꾸만 눈에 담아두었다. 눈빛은 그대로구나. 눈썹은 더 짙어 졌고, 앳된 티를 벗은 얼굴은 한층 다부진 인상이 되었다. 매너도, 대화도 무엇 하나 서투름 없어서 그간의 시간이 어땠을 지에 대해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그가 어색하지 않은 건, 에리나가 7년의 시간 동안 그를 마음 한 켠에서 밀어내지 않은 채 간직한 것처럼 그 또한 같은 마음이기 때문일까. 누군가의 초라한 방해로 인한 7년간의 간극은 단 7분만에 빠르게 좁혀졌다.



조용한 호숫가를 거닐던 에리나는 찬 바람이 파고 들자 손이 시려운 듯 실크 장갑을 낀 제 손을 마주 비볐다. 보온용이 아니어서 오히려 더 까슬까슬하니 찬기가 어렸다. 추운 거야? 죠나단은 망설임 없이 제 코트를 벗어 덮어주고 눈을 마주했다. 괜찮아요, 죠나단도 추울 텐데요, 하고 말려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떨리는 녹안이 오롯이 제 자신만을 담자 그 자리에서 굳은 듯 마른 침을 삼켰다. 에리나의 손을 잡자 두툼하고 큰 손 안에 담겼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변함없이 따뜻한 손. 푸근히 덮인 살결 안에서 시린 손가락을 웅크렸다. 에리나. 달싹이던 입술이 열리자 하얀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나는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네가 있어. 넌 여전히 내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야.”


떨리는 그의 말엔 까마득한 외로움과 슬픔이 서려 있어서 듣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웅크린 손가락을 꺼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끼워 꼭 잡았다. 희고 가느다란 손이 파고들자 죠나단은 눈꼬리를 휘며 허리를 감싸 받쳤다. 한기에 붉어진 뺨이 유독 생기가 비쳐서, 에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해. …나와 결혼 해주겠어?”


드문드문 호흡이 흐트러졌는지도 모르겠다. 목이 메어오는 와중에 속삭이듯 건네는 그의 눈동자는 정말로, 어릴 적 그대로 자신을 고스란히 바라보고 있었다. 에리나는 뛰어들 듯 그의 품에 안겨 고개를 묻었다. 들뜬 숨결을, 멈출 새 없이 뛰는 심장의 고동을. 숨김 없이 내비쳤다.


“그 말을 지난 7년 동안 기다려 왔어요.”


울먹이며 대답하는 제 등을 감싸 안는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한참 동안을 추위도, 주변도 잊었다. 바람이 한 차례 불자 죠나단은 천천히 떨어져 에리나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금색 머리카락이 나부끼며 맑고 푸른 눈동자가 깜박일 때마다 투명한 물기가 달빛에 반짝였다. 에리나의 손을 제 손 위에 올려 둔 죠나단은 약지에 천천히 반지를 끼워 넣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꼭 맞아 들어간 링과 촘촘히 박힌 다이아가 반짝였다.

이건 꽃다발 대신이야. 죠나단은 길가의 낙엽이 다 떨어진 고목을 쓰다듬었다. 문득 밝은 빛이 그의 몸에서 발하는 듯하더니 나무 줄기에서 새순이 돋아났다. 연두색 잎에서 작은 꽃망울이 곳곳에서 터져 가지를 가득 매웠다. 연분홍 빛 꽃잎이 풍성하게 거리 한 폭을 채우자 에리나의 눈동자가 커지며 어떻게? 라는 얼굴로 죠나단을 바라보았다. 잠자코 있던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제 품에 끌어안았다. 마법 같은 그의 생명력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다가오는 것 같아서, 에리나는 덩달아 그의 품에 기댔다. 행복으로 눈물 짓는 그 순간까지도. 이 순간이 영원하지 못함에도 그저 맡기고 빠져들었다.








죠나단 죠스타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 특히나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말을 아끼고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알고 있는 에리나였기에, 구태여 그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일에 캐묻지 않았다. 왜 다시 만났을 땐 전신 화상을 입은 채였는 지, 아버지는 어쩌다가 돌아가신 건지, 저택으로 간 경찰들은 왜 전부 살해당한 건지. 그에게 물어보기에 잔혹한 질문일 것 같아, 혹은 자신에게 비밀로 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 구태여 묻지 않기로 했다.

다만 에리나 펜들턴은 의사였다. 대체 어쩌다가 그런 상처를 입었는 지 짐작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입은 상처를 살필 땐 범상치 않다는 것 정돈 알 수 있었다. 오른 쪽 어깨에 창이 찔린 자국, 양 팔의 골절, 전신 화상. 하나같이 누군가의 악질적인 의도라는 걸 모를 수 없었으며, 왜 죠나단이 그 표적이 되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런 그가 또 다시 훌쩍 떠난 뒤 소식이 없다가 돌아온 그는 조금 수척해진 채로 웃어 보였다. 에리나, 이젠 다 괜찮아. 너도, 다른 사람들도 걱정 없을 거야. 저를 조심스레 끌어안는 품에 에리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는지도 모른다. 제게 청혼을 하고, 결혼식을 올리던 순간까지도. 그렇지만 지금 생각하면 좀 더 궁금해할 걸 그랬다. 지금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더라면.

타오르는 불길이 치솟을 때마다 비명소리조차 사그라드는 배 안에서, 에리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와 입술을 마주 포갰다. 차가운 숨이 맞물리자, 정말로 죠나단의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울어도 좋아.. 그렇지만, 너는 살아주었으면 해. 그의 마지막 숨결을 마주하며, 이미 어떤 방법으로도 그를 되살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우는 아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이름 모를 아이의 어머니. 절망과 함께 솟아나는 각오는 제 자신도 놀랄 만큼 고요하고 단단했다. 행복해야 해, 에리나. 그의 마지막 말에 흘린 눈물을 삼키고 몸을 피하자 바깥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관 안은 안전했지만 어디론가로 구르고,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두려웠지만 품에 안긴 아이가 놀라서 울음을 멈추자 조용히 다독였다. 검은 머리색의 갓난 아이. 아마 나 한 명이었더라면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바람은 그와 함께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어머니가 지켜준 네가 있기에, 나 또한 살았구나. 불쾌한 일들이 분명 잔뜩 스쳐 지나갔음에도 왜 이 순간에 청혼하던 죠나단이 떠오르는 걸까. 그는 내내 내 행복을 빌었음을. 자신의 죽음이 불행이 되지 않길 바랐음을. 그 의지대로 에리나는 남편을 잃었음에도 절망보다 품에 안은 아이가 살아있음에 행복을 느꼈다. 죠나단. 우리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인가 봐요. 아이가 안정적인 숨을 고르자 에리나는 눈을 감았다.

한참이 지나 바깥이 고요해짐을 느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규칙적으로 둥실거리며 떠 있는 울림을 느꼈다. 관의 뚜껑을 안에서 열자 짠 내음이 느껴지는 바닷 공기가 트여 넘실거렸다. 답답한 관 안에서 잘 참은 듯, 아기가 작게 옹알거렸다. 살아 있다, 자신은. 아이를 안고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꿀 때 문득 자그마한 고동을 느꼈다. 아이의 심장 소리인 줄 알았지만, 희미하게 다른 울림이 느껴졌다. 설마, 하는 느낌에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반응해오듯 한 번 더 울리는 것에 에리나는 제 품에 안은 아이가 놀라지 않게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죠나단이 구한 사람은 셋이었고, 자신이 지켜야 할 몫은 둘이었다. 행복해야 해. 별이 주고 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에리나는 배 위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제 품에 안긴 아이를 소중히 감싸 안았다. 세 생명을 태운 관은 광활한 바다를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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